부활의 첫 소식을 들은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그 말을 허탄한 헛소리로 여겨 믿지 못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빈 무덤을 보고도 그저 놀랍게만 여기며 돌아갔습니다. 부활은 우리의 상식과 경험의 틀을 완전히 파괴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활은 인간의 얄팍한 이해의 영역을 넘어, 하나님께서 친히 마음을 열어주실 때 열리는 계시와 믿음의 거룩한 신비입니다.
주님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책망하며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시며 그들의 불신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이 열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부활 신앙으로 거듭났고, 안식일이 아닌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 예배하는 교회의 위대한 시작을 이루어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세상을 이길 담대함을 주고, 고난 속에서도 인내하며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바울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살아내야 할 부활 성도의 세 가지 존재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평강의 존재 방식입니다. 사망을 조롱하며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선포하는 하늘의 유머와 여유를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매일 십자가를 경험하는 진리의 존재 방식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처럼 내 안의 옛 자아를 죽일 때, 비로소 불의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소망의 용기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셋째, 세상의 장벽을 허무는 사랑의 존재 방식입니다. 에비슨 선교사가 신분제라는 사회적 무덤을 깨고 백정 박성춘을 살려낸 것처럼, 미움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화목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부활은 그저 머리로 동의하고 끝나는 이론이 아니라 가슴으로 깊이 고백하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구체적인 삶으로 증명해내야 할 기적의 실재입니다. 겟세마네의 처절한 핏방울과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생명의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된 것처럼, 여러분의 삶을 짓누르는 어떠한 무덤 같은 상황과 절망도 부활의 권능 앞에서는 완전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사망의 중력에 끌려가지 마시고, 사도 바울처럼 하늘의 평안을 누리며, 본회퍼처럼 진리 앞에 용기 있고, 에비슨 선교사처럼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해 사랑을 흘려보내는 부활의 산증인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경말씀
누가복음 24 : 1 - 11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